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다는 소식에 세계의 많은 이들이 슬픔에 빠졌다. 참어른의 존재가 꼭 필요한 때에 그분의 빈자리가 너무 커 보인다. 2013년 3월 13일, 베네딕토 16세의 뒤를 이어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던 그는 전임 교황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해왔던 바오로, 요한 혹은 베네딕토 등의 교황명을 사용하지 않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잊지 않기 위해 최초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하며, 가난한 자들의 수호성인인 아시시의 聖 프란치스코를 본받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었다.
故 프란치스코 교황은 화려한 바티칸 내 교황 전용 숙소를 마다하고 교황청 사제들의 기숙사인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거주했으며, 교황의 상징인 금 십자가 대신 낡은 십자가를 착용하셨었다. 또한 추기경들과 함께 이동할 때는 전용車 대신 버스를 이용 했으며, 어디에서나 가난하고 소탈한 삶을 몸소 실천하셨다. 이렇듯 ‘빈자들의 성자’로 불리며 소외된 사람들을 위로해 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재산은 100달러(14만원)가 전부였다. 그는 교황 즉위 후 예수회 출신 성직자로서 평생 청빈한 삶을 이어가겠다며 무보수로 봉사해 왔었다. 유언장에는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지하에 특별한 장식 없이 간소하게 묻어달라고 하셨으며, 비문에는 오직 이름 ‘Franciscus’만 남기길 당부하셨다.
“하느님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고 역설한 교황은 교회 개혁을 주도하셨다. 성소수자를 비롯해 고난 받는 이들을 포용하셨고, 불평등과 부정부패는 날카롭게 비판하며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셨다. 또한 성직자의 성폭력 등 교회의 과거사 사과와 청산도 외면하지 않으셨다. 교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아온 그는 선종 전날, 부활절 기념 미사를 통해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이루자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하셨다. 조문 기간 내내 교황의 관을 열어 두어 고인을 사랑했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고인을 볼 수 있도록 하셨으며, 관은 높은 제단이 아닌 바닥에 놓아 조문객 눈높이보다 아래에 몸을 누이셨다.
故 프란치스코 교황과 한국의 인연은 각별했다. 교황은 취임 다음해인 2014년 아시아 순회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하셨다. 천주교도 비율이 전체 인구의 10%에 불과했지만 한국은 평신도들의 자생적인 노력으로 천주교가 전파된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이리라 짐작해본다.
교황의 마지막 길에 함께하고자 최소 수십만 명이 바티칸과 로마에 머물렀다. 교황청에 따르면 미사에 25만 명 이상이 참석했고, 사흘 간의 일반 조문에도 약 25만 명의 인파가 참석했다.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 검소하며 소탈한 삶을 실천했던 故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 세계의 애도 속에서 영면에 드셨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으로 차기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비밀회의 ‘콘클라베’가 열렸는데, 이틀째 되는 날 시스티나 성당은 ‘흰 연기’를 뿜으면서 제267대 교황의 탄생을 알렸다. 주인공은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다. 그가 앞으로 사용할 교황 즉위명은 ‘레오 14세’다. 레오는 라틴어로 ‘사자’를 뜻하는데 강인함과 용기, 리더십을 상징한다. 레오 14세 교황은 이날 선출 확정 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로 나와 이탈리아어로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이라고 첫 발언을 했다. 끝나지 않는 전쟁과 전염병, 자연재해, 양분된 사회 등 수많은 과제가 쌓여 있는 우리 사회에 영적 생명을 불어넣어줄 교황의 첫 메시지는 平和였다.
레오14세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원 총장 시절 4차례나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세계청년대회(WYD) 참석을 위해 2년 후에 한국을 또 찾을 예정이다. 레오 14세는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가진 첫 부활 삼종기도에서 “오늘날 세계는 제3차 세계대전이 조각조각 벌어지는 극적인 시나리오를 겪고 있는데 더 이상의 전쟁은 안 된다.”고 강조하셨는데 그의 기도처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도 멈추는 것뿐만 아니라, 향후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지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 본다.
(사)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황규만